당신은 언어를 만들지 않았다
세 살짜리 아이가 "밥 먹었어?"라고 묻는다. 부모는 문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의문문 어순도, 과거 시제도, 종결어미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안다. 어떻게?
답은 간단하다. 아이는 언어를 만들지 않는다. 발견한다.
놈 촘스키(Noam Chomsky)는 이걸 언어 습득 장치(Language Acquisition Device, LAD)라고 불렀다. 인간의 뇌에는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이 내장되어 있다. 주어-목적어 구조, 재귀 규칙, 이동 변형 같은 원리들이 선천적으로 존재한다. 아이는 주변에서 듣는 몇 마디 문장만으로 이 구조를 활성화한다. 배우는 게 아니라 깨운다. 한국어든 영어든 스와힐리어든 이 틀 안에서 변주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모든 문장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는 달렸다"라고 쓸 때, 그 문법 구조는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수천 년 언어 진화가 만든 것이다. 나는 그 구조를 빌려서 내 의도를 표현했을 뿐이다. 단어도 내가 만들지 않았다. '달리다'라는 동사는 이미 존재했다. 나는 선택했다. 조합했다. 배치했다.
그런데 LLM으로 글을 쓰면 갑자기 문제가 된다. "그건 네 글이 아니잖아." 도구가 문장을 만들었으니 작가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이상한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도 이미 주어진 구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 능력 자체가 외부에서 주어진 시스템이다. LAD는 타고난 것이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LLM도 똑같이 작동한다. 수십억 개의 문장에서 패턴을 학습한다. "~했다" 뒤에 종결 어미가 온다는 것. "그러나"는 대조를 나타낸다는 것. 이런 규칙들이 파라미터에 각인된다. 우리가 LAD를 통해 보편 문법을 활성화하듯, LLM은 학습된 구조를 활성화한다.
차이는 생물학적이냐 공학적이냐일 뿐이다. 둘 다 외부에서 주어진 구조에 의존한다.
내가 LLM에게 "이런 주제로 써줘"라고 하면 모델은 가능한 문장들을 제시한다. 나는 고른다. 수정한다. 버린다. 이 선택의 연속이 내 목소리를 만든다. 편집자가 초고를 다듬어준다고 작가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작곡가가 악기 연주자에게 의존한다고 창작성이 없어지지 않는다. 피카소는 붓을 만들지 않았다. 베토벤은 피아노를 발명하지 않았다.
작가성은 도구의 순수함이 아니라 선택의 일관성에서 나온다. 무엇을 고르고 버리는가. 그것이 나를 규정한다.
"하지만 LLM은 내 생각을 대신 쓰지 않나?" 아니다. 손으로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내 뇌가 문장을 만들 때 나는 그 과정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경망이 알아서 처리한다. "달렸다"라는 단어가 왜 떠올랐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나온다. LAD가 작동한 것이다.
LLM을 쓰면 이 블랙박스가 외부로 나왔을 뿐이다. 뇌 안에 있든 클라우드에 있든 본질은 같다. 주어진 구조가 문장을 생성하고 나는 선택한다.
셰익스피어도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구조를 빌렸다. 김소월도 한자어와 한글의 체계 위에서 시를 썼다. 순수한 창작은 애초에 없다. 우리는 항상 이전 세대가 물려준 언어로 쓴다. 문법도 어휘도 표현 방식도 모두 물려받은 것이다.
글쓰기는 처음부터 협업이었다. 수천 년 언어 사용자들과의 협업. LLM은 그 협업자 목록에 하나가 추가된 것뿐이다.
LLM을 쓰면 글이 '진짜 내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손으로 쓴 문장은 정말 '내 것'인가. 그 문법 구조는 수천 년 진화의 산물이다. 내가 만든 단어는 하나도 없다. 나는 그저 기존 요소들을 새롭게 배치했을 뿐이다.
결국 글쓰기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주제를 다룰지. 어떤 관점에서 볼지. 어떤 문장을 남기고 어떤 문장을 지울지. 이 선택들이 쌓여서 목소리가 된다. 도구가 바뀐다고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손으로 쓰든 키보드로 치든 AI에게 받아쓰게 하든, 선택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다.
우리는 이미 언어라는 거대한 도구를 타고났다. 그 도구 없이는 생각조차 형성되지 않는다. LLM은 그 도구를 확장한다. 더 빠르게, 더 유연하게, 더 다양하게.
작가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도구로 무엇을 할지 아는 사람이다.
그 세 살짜리 아이도 언어를 만들지 않았다. 발견했고, 선택했고, 사용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AI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주어진 구조를 빌려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게 언어고, 그게 글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