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고조시켜봐
릴스를 본다. 15초가 지나간다. 또 본다. 한 시간 후, 뭘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건 시간 낭비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는 뭔가를 천천히 고조시키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편지를 기다렸다. 며칠, 때론 몇 주를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상상했다. 걱정했다. 기대했다. 편지를 받았을 때의 감정은 그래서 강렬했다. 지금은 메시지를 보내고 3분 안에 답이 안 오면 불안하다.
드라마를 보던 방식도 바뀌었다. 90년대에는 일주일을 기다려야 다음 편을 볼 수 있었다. 그 일주일 동안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다음 편에 뭐가 나올까?" 학교에서, 회사에서, 집에서. 기다림 자체가 경험의 일부였다. 지금은 넷플릭스가 전 시즌을 한꺼번에 푼다. 몰아보기를 한다. 다 보고 나면 뭔가 허전하다.
롤랑 바르트는 좋은 이야기의 비밀을 '해석학적 코드'라고 불렀다. 수수께끼를 던지되, 답을 바로 주지 않는다. 지연시킨다. 그 지연이 서스펜스를 만든다. 독자는 답을 궁금해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숏폼은 이 지연을 견디지 못한다. 3초 안에 훅이 없으면 스와이프한다. 답은 즉시 나와야 한다. 아니, 답조차 필요 없다. 그냥 자극이면 된다. 기다림은 삭제됐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이다. 빌드업이란 결국 시간을 들여 뭔가를 고조시키는 과정이다. 감정이든, 긴장이든, 기대든. 시간이 쌓여야 강도가 생긴다.
내가 아는 한 사진작가는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일주일을 기다린 적이 있다. 빛의 각도가 정확히 맞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 사진을 보면 뭔가 다르다. AI가 0.3초 만에 생성한 완벽한 이미지와는 다른 무게가 있다.
4년을 고생해서 뭔가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그 과정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근데 해냈다. AI는 4년치 결과물을 4초 만에 뱉어낼 수 있다. 근데 그 4년의 무게는 못 만든다. 시간이 만든 깊이는 복제할 수 없다.
문제는 이제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밤양갱이 유행했다가 사라졌다. 두바이 초콜릿도 마찬가지였다. 미디어가 만든 급조된 열풍은 빠르게 왔고 빠르게 사라진다.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 고조시키는 것. 그게 희귀해지고 있다.
경제학에는 단순한 원리가 하나 있다. 희귀하고 유용한 것은 비싸진다.
1990년대엔 정보가 희귀했다. 백과사전이 비쌌다. 도서관이 중요했다. 지금은 정보가 범람한다. 구글에 치면 다 나온다. 정보의 가치는 떨어졌다.
2000년대엔 연결이 희귀했다.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는 게 의미 있었다. SNS 친구 수가 중요했다. 지금은 누구나 연결돼 있다. 인스타 팔로워 1000명은 아무 의미 없다. 연결의 가치는 떨어졌다.
2020년대엔 콘텐츠가 희귀했다. 좋은 글, 좋은 영상, 좋은 이미지. 근데 이제 AI가 쏟아낸다. ChatGPT가 글을 쓴다. Midjourney가 이미지를 만든다. 클릭 한 번에 콘텐츠가 나온다. 콘텐츠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다.
그럼 뭐가 희귀해지는가? 시간이다. 정확히는, 시간을 들여 쌓아올린 것들이다.
누구나 AI로 글을 쓸 수 있다. 근데 누구나 4년을 투자할 수는 없다. 누구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다. 근데 누구나 일주일을 기다릴 수는 없다.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근데 누구나 깊이를 만들 수는 없다.
빌드업은 시간성이다. 고조는 시간성이다. 그리고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모두가 15초에 집중한다. 모두가 즉각적 결과를 원한다.
그래서 역설이 생긴다. 빌드업이 죽어갈수록, 빌드업의 가치는 올라간다. 고조가 사라질수록, 고조시키는 능력은 비싸진다.
우리를 고조시키는 것은 비싸질 것이다. 영화관에서 3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경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경험. 한 사람과 몇 년에 걸쳐 관계를 쌓는 경험. 전부 시간이 필요하다. 전부 희귀해지고 있다.
가격은 희소성을 따라간다. 언제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