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이 없다
중산층이 사라진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소득 통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2026년 한국 경제에서 사라지는 건 소득 구간이 아니다. 어중간한 선택지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K자 모양(K-Shape)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K가 아니다. 경기 회복이 알파벳 K처럼 위아래로 갈라지는 양극화를 뜻한다. 누군가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누군가는 계속 떨어진다. 중간 지점은 없다. 이게 지금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반도체 수출은 급증했다. AI 붐이 삼성과 SK하이닉스를 밀어올렸다. 대기업 실적은 화려하다. 하지만 거리에 나가보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편의점 도시락을 사는 사람들, 다이소에서 장을 보는 가족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에서 옷을 주문하는 젊은이들. 내수는 얼어붙었다. 중소기업은 버티기에 급급하다. 전통 제조업은 중국발 공급 과잉에 짓눌렸다.
이 분열은 단순한 경기 사이클이 아니다. 구조가 바뀌고 있다.
수도권 아파트 값은 여전히 높다. 백화점 명품 매장은 붐빈다. 고소득층은 자산 가격 상승의 수혜를 입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고 외식을 하고 명품을 산다. 반면 저소득층은 생계비 부담에 지갑을 닫았다. 그들이 찾는 건 5,000원짜리 다이소 제품이거나 3,000원짜리 중국산 티셔츠다. 중간 가격대 브랜드는 설 자리를 잃었다. 2만 원짜리 캐주얼 티셔츠를 누가 사는가? 돈이 있으면 10만 원짜리를 사고, 없으면 3,000원짜리를 산다.
"어중간하면 죽는다"는 말이 비유가 아닌 시대가 왔다.
이건 소비재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방 경제는 무너지고 있고, 미분양 아파트는 쌓여간다. 서비스업은 회복했지만 내구재 소비는 떨어졌다. 자동차를 바꾸지 않고, 가전을 새로 사지 않는다. 대신 해외여행은 간다. 먹고 마시는 데는 돈을 쓴다. 경험에는 지갑을 열지만 물건에는 닫는다.
이 모든 분열이 한 단어로 압축된다. K-쉐이프. 위로 튀는 선과 아래로 꺾이는 선. 그 사이 중간은 텅 비어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마케터부터 보자. 불특정 다수에게 뿌리는 광고는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사람과, 철저하게 실속을 챙기는 사람. 전자는 브랜드 팬덤을 원하고, 후자는 가격표만 본다. 마케터는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로 무장해야 한다. AI를 활용해 고객 행동을 실시간으로 예측하고, 예산은 증분 성과 측정(Incrementality Testing)으로 최적화한다. 광고가 없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매출만 챙긴다. 나머지는 버린다.
그리고 팬덤을 만들어야 한다. 단순 구매자가 아니라 옹호자를. 틱톡(TikTok) 쇼퍼테인먼트(Shoppertainment)가 폭발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콘텐츠와 커머스가 합쳐진 순간 사람들은 물건이 아니라 신뢰를 산다. 크리에이터는 그 신뢰를 파는 사람이다.
프로덕트팀은 더 단순하다. 노선을 정해야 한다. 가성비냐, 절대 가치냐. 둘 중 하나다. 다이소는 가격 역설계(Reverse Price Design)로 승부했다. 소비자가 납득할 가격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원가와 패키징을 설계했다. 5,000원 이하로 만들 수 없으면 출시하지 않았다. 반대편에는 LG전자의 초고가 빌트인 가전이 있다. VVIP를 겨냥한 예술적 경험.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제품. 중간은 죽는다.
카테고리 확장도 필수다. 패션 브랜드가 뷰티로 넘어가고, 남성복이 여성 라인을 출시한다. 한 우물만 파다간 말라붙은 우물에 갇힌다. 파이프라인을 다각화해야 살아남는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제품, 멀티 스타일링이 가능한 옷.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CEO는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내수 시장은 쪼그라들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거스를 수 없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에 빠지면 안 된다. 한국만 바라보면 죽는다. 동남아시아, 미국, 유럽.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K-패션과 K-푸드는 이미 모멘텀을 얻었다. 그 파도를 타야 한다.
그리고 백필(BACKFILLED) 전략이 필요하다. 외형 확장보다 내실을 다지는 것. 비효율적인 사업은 정리하고, 핵심에 자원을 집중한다.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AI를 도입해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지금은 뛰어오를 준비를 하는 시기다. M&A 기회도 있다. 중소·중견 기업 밸류에이션이 낮아졌다. 현금을 쥔 기업은 지금 알짜 기업을 낮은 가격에 인수할 수 있다.
중간은 사라졌다. 선택해야 한다. 위로 갈 것인가, 아래로 갈 것인가.
어중간한 전략은 어중간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실패를 낳는다. 2026년까지 이어질 K-쉐이프 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명확해져야 한다. 타깃을 정하고, 가격을 정하고, 전략을 정한다. 초저가 아니면 초고가. 팬덤 아니면 가성비. 내실 아니면 글로벌.
중간 지대는 전장터가 아니다. 무덤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누군가는 K의 위쪽 선을 타고 올라갈 것이고, 누군가는 아래쪽 선을 따라 내려갈 것이다. 중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제 질문은 간단하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 질문조차 사치다. 이미 시장이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