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지능이라는 무지능

나는 “다정함을 지능으로 본다”라는 말이 유행하는 현상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다정함’을 일종의 지적 능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구가 요즘 이렇게 널리 퍼진 이유는, 결국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뚝 잘려나온 ‘짤’ 때문이라는 점이 못내 거슬린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명제들을 K-드라마 작가들이 공들여 쥐어짜낸 한두 줄에 의탁하고 있는 걸까? 드라마가 말하고자 한 전체 맥락은 무시한 채, 그저 ‘심쿵’ 포인트를 뽑아내 ‘명대사’로 소비해버리는 문화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마치 잘 편집된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고 그 작품 전체를 다 본 것처럼 자만하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보니 정작 서사는 공기처럼 소외된다. 플롯 전체가 아니라 ‘명대사’ 몇 줄에 모든 에너지가 쏠리는 것이다. 드라마는 어느새 ‘짤의 모음집’이 되어버렸다. 시청자 역시 이야기 전반의 흐름이나 주제 의식보다, 언제 ‘심쿵’할 만한 대사가 튀어나올지를 기다린다. 그 한 줄짜리 문장을 캡처해 SNS에 퍼 나르고, “좋아요”와 “공감”을 눌러대는 순간, 이미 드라마는 완성된 예술이 아니라 “심쿵 유발형” 대사 제작 공장으로 전락한다.

문제는 이런 ‘대사 중심주의’가 우리의 일상에도 묘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한 번 들으면 “오, 좋다!” 하고 쉽게 감동하는 습관이 생기면, 깊은 사유를 거치기도 전에 마치 ‘진리’를 얻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쉬워진다. 그래서 이제 묻고 싶다. 왜 인생의 중요한 통찰들은 대본 작가들의 상상에 기대야 하는가? 혹은, 왜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만들어내야 할 인생관조차 드라마 대사 한 줄로 퉁치려 하는가?

그 결과물이 고작 “다정함을 지능으로 본다” 같은 ‘멋진 소리’라면, 그것은 어쩌면 다정함도, 지능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공허한 유행어일 뿐이다. 이 말이 진실이 되려면, 최소한 우리가 직접 사유하고 실천해본 끝에 얻은 통찰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 없이 무작정 바이럴된 대사는 결국, 누군가를 ‘심쿵’시키는 광고 문구 이상의 가치를 갖기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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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파는 시대는 끝났다

당신의 전문성은 이미 자산이다. 문제는 아무도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컨설턴트는 시간을 판다. 변호사는 시간을 판다. 디자이너도, 개발자도, 마케터도 시간을 판다. 하루 8시간, 한 달 160시간. 시간이 곧 돈이다. 그렇게 10년을 일하면 무엇이 남는가? 경력과 피로. 자산은 없다. 대니얼 프리스트리(Daniel Priestley)는 《핵심 영향력자(Key Person of Influence)》에서 경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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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이 문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하다. 너무 당연해서 질문을 막기 때문이다. 질문은 간단하다. 누가 범죄자를 정하는가? 이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명제는 도구가 된다. 누군가의 도구. 대개는 권력의 도구.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었다. 유대인은 독일 시민권을 잃었다. 법적으로 완벽했다. 의회를 통과했고, 법원이 집행했다. 게슈타포는 법을 따랐다.

전진배치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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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지의 종말 AI가 모든 명시지를 장악했다. 검색하고, 조합하고, 최적화한다.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은 이제 기계가 더 잘한다. 맥킨지의 전체 보고서 데이터베이스를 3초 만에 검색한다. 100개 산업의 베스트 프랙티스를 조합한다. 5개 언어로 완벽한 문서를 작성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완벽한 전략이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데이터는 완벽했는데 직원들이 반발한다. 논리는 탄탄했는데 고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