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환되지 않는 실력

1971년 8월 15일, 닉슨이 금태환을 정지시켰다. 그 전까지 달러는 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35달러를 들고 가면 금 1온스를 줬다. 그게 달러의 신뢰 기반이었다. 닉슨이 그걸 끊었다. 달러는 여전히 달러였지만, 더 이상 금으로 바뀌지 않았다. 태환이 막힌 것이다.

비슷한 일이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분명 실력이 있다. 열심히 했다. 결과물의 퀄리티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기회가 안 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실력이 기회로 안 바뀐다. 마치 달러를 들고 은행에 갔는데 금을 안 주는 것처럼. 태환이 막혀있다.

태환(兌換): 어떤 가치를 다른 가치로 교환하는 것. 금본위제에서 화폐를 금으로 바꿔주는 것을 금태환이라 했다. 실력이 기회로, 기회가 성과로, 성과가 보상으로 바뀌는 것도 일종의 태환이다.

문제는 이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력만 쌓으면 자동으로 태환될 거라고 믿는다. 금본위제 시절의 달러처럼. 하지만 현실에서 태환은 자동이 아니다. 태환을 가능하게 하는 별도의 통화가 있다. 그게 신뢰다.

신뢰는 태환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금이다. 금본위제에서 미국이 충분한 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러가 금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이 충분한 신뢰를 보유하고 있어야 실력이 기회로 바뀔 수 있다. 신뢰 준비금이 바닥나면 닉슨 쇼크가 일어난다. 태환 창구가 닫힌다.

왜 신뢰가 준비금 역할을 하는가. 기회를 주는 쪽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기회를 준다는 건 리스크를 진다는 뜻이다. 프로젝트를 맡긴다, 투자를 한다, 채용을 한다. 전부 리스크다. 그 리스크를 감수하게 만드는 게 신뢰다. 실력은 조건이고 신뢰는 트리거다. 조건이 갖춰져도 트리거가 당겨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실력 80점에 신뢰 90점인 사람이 기회를 가져간다. 실력 95점에 신뢰 40점인 사람은 기회를 못 잡는다. 불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기회를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리스크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맡기는 리스크가 더 크다.

신뢰 준비금의 비대칭성: 쌓는 데는 오래 걸리고 무너지는 데는 한순간이다. 열 번의 약속을 지켜서 쌓은 준비금을 한 번의 배신으로 잃는다. 닉슨 쇼크는 하루아침에 일어났지만, 그 전까지 미국이 금 준비금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재밌는 건 태환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실력이 기회로 태환된다. 기회가 성과로 태환된다. 성과가 평판으로 태환된다. 평판이 관심으로 태환된다. 관심이 영향력으로 태환된다. 영향력이 다시 신뢰로 태환된다. 이 사이클이 돌아가면 복리가 생긴다. 위로 굴러갈 수도 있고 아래로 굴러갈 수도 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준비금이 필요하다. 실력을 기회로 바꾸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기회를 성과로 바꾸려면 실행력이 필요하다. 성과를 평판으로 바꾸려면 가시성이 필요하다. 평판을 관심으로 바꾸려면 유통 채널이 필요하다. 어느 한 단계에서 준비금이 바닥나면 태환이 막힌다. 사이클이 끊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막혀있다. 실력이 기회로 안 바뀐다. 그리고 원인을 실력 부족에서 찾는다. 더 열심히 한다. 더 공부한다.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 그런데 여전히 안 바뀐다. 당연하다. 문제는 실력이 아니라 신뢰 준비금이다. 틀린 문제를 풀고 있다.

결국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왜 태환이 안 되는가. 어느 단계에서 막혀있는가. 그 단계의 준비금은 무엇인가. 그 준비금이 얼마나 있는가. 이걸 모르면 평생 달러를 쌓으면서 왜 금이 안 나오는지 의아해하게 된다. 1971년 이후에도 금본위제를 믿고 있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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