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시타와 평균 사이

적시타와 평균 사이

결국 사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부분 사람들이 착각하는 지점이 있다. 모두가 병살타를 피하고 평균 타율에 수렴하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회의실에서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곧바로 나오는 질문들. "데이터 있어요?" "리스크는 어떻게 관리할 건가요?" "기존에 성공한 사례가 있나요?"

유튜브에 올라오는 창업 영상들을 보라. "안전한 투자",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 "위험 최소화"라는 키워드가 범람한다. 그런데 정말 그게 목적일까? 모든 타자가 병살타만 피하면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까?

조직과 생산의 일반적 방해공작

1944년 1월 17일, 워싱턴 D.C.에서 William J. Donovan 감독이 서명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현CIA의 전신)의 'Simple Sabotage Field Manual'은 흥미로운 문서였다. 적국 조직을 내부에서 마비시키는 방법을 일반 시민들에게 가르치는 매뉴얼이었다. 폭탄이나 총이 아닌, 일상적인 행동들로 말이다.

이 32페이지 분량의 매뉴얼은 5개의 주요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서론, 2) 가능한 효과, 3) 사보타주 수행자 동기부여, 4) 도구·목표·타이밍, 5) 단순 사보타주를 위한 구체적 제안. 마지막 섹션은 12개 세부 분야로 나뉘는데, 건물 파괴부터 제조업, 교통, 통신, 전력까지 거의 모든 사회 인프라를 다룬다.

하지만 가장 소름끼치는 부분은 마지막 두 섹션이다. "조직과 생산의 일반적 방해공작"과 "사기 저하와 혼란 조성을 위한 일반적 장치." 여기서 제시하는 조직 마비 전술들이 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회의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매뉴얼의 구체적 지침들을 보자.

"Organizations and Conferences" 섹션에서는 이런 방법들을 제시한다:

"Insist on doing everything through 'channels.' Never permit short-cuts to be taken in order to expedite decisions(모든 것을 '공식 채널'을 통해 처리하라. 의사결정을 빠르게 하기 위한 지름길을 절대 허용하지 말라)."

"Make 'speeches.' Talk as frequently as possible and at great length(연설을 하라. 가능한 한 자주, 길게 말하라)."

"When possible, refer all matters to committees, for 'further study and consideration.' Attempt to make the committees as large as possible—never less than five(가능하면 모든 안건을 '추가 연구와 검토'를 위해 위원회에 넘겨라. 위원회는 가능한 한 크게—절대 5명 미만이면 안 된다)."

"Managers and Supervisors" 섹션은 더욱 구체적이다.

"Demand written orders(서면 명령을 요구하라)."

"Hold conferences when there is more critical work to be done(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회의를 열어라)."

"Multiply the procedures and clearances involved in issuing instructions(지시사항 발행에 관련된 절차와 승인 과정을 늘려라)."

"In making work assignments, always sign out the unimportant jobs first(업무 배정 시 항상 중요하지 않은 업무부터 배정하라)."

이 지침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오늘날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너무 닮았다는 것. 직감으로 나온 아이디어를 데이터로 찍어누르고, 혁신을 위원회에 맡겨 평균으로 희석시키고, 작은 리스크까지 길게 논의하며 시간을 소모한다.

기타노 유이가의 '천재를 죽이는 범인'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범인(평범한 사람)은 안정을 추구한다. 천재가 혁신적 아이디어를 내면 "그건 안 될 거야", "예산이 없어", "위험해"라며 막아선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평균으로 수렴한다.

회의와 위원회의 함정

다니엘 카네만의 이중 프로세스 이론에서 시스템 1은 빠르고 직관적이지만 정확성을 희생하고 편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시스템 2는 느리고 분석적이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시스템 1에 의존하려 하지만, 회사와 조직은 시스템 2적 절차의 과잉으로 인해 혁신을 억누르곤 한다.

체스 마스터가 순간적으로 최적의 수를 찾는 건 시스템 1 덕분이다. 수십 년간 쌓인 경험이 무의식적 패턴 인식으로 작동하는 것. 하지만 회사에서 "직감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아이디어는 죽는다. "객관적 근거를 가져와"라는 말과 함께.

AI가 모든 것을 선형적으로 평준화시키는 시대다. 누구나 똑같은 도구를 쓰고, 비슷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유사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 차이는 어디서 오나? 바로 그 '스파크'에서 온다. 논리의 사각지대에서 번쩍 떠오르는 직감에서.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 때 시장조사부터 했을까? 고객들에게 "터치스크린 핸드폰 원해요?"라고 물어봤다면 대답은 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스템 1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적시타를 날렸다.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상의 기술들

그럼 답은 뭘까? 무작정 직감만 믿고 돌진하자는 게 아니다. 순서가 중요하다. 뺨 때리고 안아주는 것과 안아주고 뺨 때리는 것이 전혀 다르듯이.

직감으로 빠르게 진행한다. 그리고 실패 자체를 회피하기보다는 실패 발생 시의 범위를 최소화한다. 망할 거라면 빨리 망하고, 대응을 빠르게 한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포스트모템(Postmortem)를 통해 직감 자체를 교정해나가는 것.

넷플릭스는 이런 식으로 일한다. 콘텐츠를 만들 때 완벽한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직감과 경험으로 빠르게 제작하고, 출시 후 데이터를 보며 다음 직감을 교정한다. 실패작이 나와도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투자하고, 성공작이 나오면 확장한다.

스타트업들이 MVP(Minimum Viable Product)를 만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고 2년을 투자하지 않는다. 직감으로 빠르게 만들어 시장에 던지고, 반응을 보며 수정한다. 실패해도 죽지 않을 정도의 탄약으로.

한편, 사보타지 매뉴얼의 마지막 섹션 "사기 저하와 혼란 조성을 위한 일반적 장치"에서는 더욱 교묘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Give lengthy and incomprehensible explanations when questioned(질문을 받으면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하라)."

"Act stupid(바보처럼 행동하라)."

"Be as irritable and quarrelsome as possible without getting yourself into trouble(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한 짜증스럽고 다투려 하라)."

"Misunderstand all sorts of regulations concerning such matters as rationing, transportation, traffic regulations(배급, 교통, 교통 규정 등 각종 규정들을 잘못 이해하라)."

카페에서 창업 계획서를 몇 달째 작성하는 사람들을 본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하고, 모든 리스크를 계산하려 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놓친다. 언제 방망이를 휘둘러야 하는지 아는 감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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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의 진짜 목적은 모두가 병살타를 피해 평균 타율에 수렴하는 게 아니다. 평균이하를 감수하되, 적은 리스크로 적시타를 만드는 것이다.

병살타를 피하려고만 하면 번트만 계속 대게 된다. 안전하지만 점수는 나지 않는다. 반대로 매번 홈런만 노리면 삼진아웃만 늘어난다.

인스타그램에서 성공한 브랜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데이터만 보고 만든 콘텐츠는 '평균적으로 좋다'. 하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반면 직감으로 만든 콘텐츠는 절반은 망하지만, 나머지 절반이 바이럴이 된다.

그 사이 어딘가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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